건설공사 현장에서 관계수급인 소속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실제 시공업체뿐 아니라 공사를 발주한 사업주에게도 산업안전보건법상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가 문제 됩니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작업하는 관계수급인 근로자에 대해서도 도급인이 안전·보건조치의무를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의무를 위반하여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67조에 따른 형사책임도 문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공사를 발주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발주자가 곧바로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건설공사를 도급하는 자 중 공사의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하지 않는 자를 ‘건설공사발주자’로 규정하고, 이를 도급인의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설공사와 관련한 산업안전보건법상 형사책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사업주가 단순한 건설공사발주자인지, 아니면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한 도급인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대법원은 2024도5902 판결에서 그 구별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발전소 건설공사 중 발생한 사망·상해 사고
이 사건의 피고인 법인은 전력자원의 개발 및 판매를 주된 사업목적으로 하는 회사로서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피고인 법인은 발전소 공사 중 배연탈황설비 공사를 전문업체에 도급하였고, 해당 설비공사와 전기제어공사를 수행하던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검찰은 피고인 법인이 발전소 공사의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한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한다고 보아, 피고인 법인과 그 소속 안전보건관리책임자 및 직원들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원심 역시 피고인 법인이 배연탈황설비 공사를 포함한 발전소 건설공사의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한 도급인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관련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이 피고인 법인의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과 전문성, 시공능력 등을 충분히 심리하지 않았다고 보아 일부 유죄 부분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과 건설공사발주자의 구별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의무를 관계수급인의 근로자에게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도급인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작업하는 관계수급인의 근로자에 대해서도 필요한 안전·보건조치를 하여야 하고, 그 의무를 위반하여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건설공사의 경우에는 공사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도급인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건설공사를 도급하는 자라 하더라도 공사의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하지 않는 경우에는 건설공사발주자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건설공사발주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별도의 산업재해 예방의무를 부담하지만, 관계수급인 근로자의 사망에 관하여 도급인을 전제로 한 산업안전보건법 제167조의 형사책임을 곧바로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명칭이나 계약 형식보다 실제 공사 수행 과정에서 발주자가 어떠한 권한을 행사하였는지가 중요합니다.
핵심은 유해·위험요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
대법원은 건설공사를 도급한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 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재해의 유해·위험요소에 대하여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합니다.
첫째, 발주자가 해당 공사에 대하여 실제로 행사한 영향력의 정도입니다.
발주자가 단순히 공정이나 품질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공법, 작업순서, 인력 배치, 장비 사용, 안전시설 설치 등의 구체적인 시공 과정에 관여하였다면 도급인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둘째, 발주자의 해당 공사에 관한 전문성입니다.
발주자가 해당 공사에 관한 전문기술과 경험을 갖추고 수급인의 공사 수행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면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셋째, 발주자의 시공능력과 전문인력 및 설비 보유 여부입니다.
건설공사의 시공에 필요한 자격이나 전문인력, 장비를 갖추지 않은 사업주가 전문업체에 공사를 맡긴 경우에는 발주자가 직접 시공을 주도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넷째, 도급계약상 안전관리 권한과 의무가 누구에게 부여되어 있었는지입니다.
계약서의 문구만으로 책임 유무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사상 유해·위험요소의 관리 권한이 누구에게 부여되어 있었는지는 실제 공사 수행 형태와 함께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됩니다.
발주자의 점검과 확인만으로 형사책임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번 판결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발주자가 수급인의 공사에 관여하였다는 사정만으로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한 점입니다.
건설공사발주자도 관련 법령과 도급계약에 따라 공정, 품질, 안전 등을 점검하거나 확인할 의무를 부담할 수 있습니다.
발주자가 공사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수급업체 간 일정을 조정하며, 설계도서와 시공 결과의 일치 여부를 점검하는 것은 도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통상적인 관리행위일 수 있습니다.
특히 발주자가 산업안전보건법상 형사책임을 우려하여 안전 관련 점검이나 수급인에 대한 시정 요구를 주저하게 된다면 오히려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법의 목적에 반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주자의 일반적인 점검·조정·확인 행위와 시공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총괄·관리하는 행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대법원이 피고인 법인을 도급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유
대법원은 피고인 법인이 전력자원의 개발 및 판매를 주된 사업목적으로 하는 회사라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또한 피고인 법인이 배연탈황설비 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해·위험요소를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해당 공사에 관한 높은 전문성을 보유한 상태에서 수급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피고인 법인이 공사 진행을 점검하고 일정한 조정과 확인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배연탈황설비 공사의 시공을 주도하여 총괄·관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법원은 피고인 법인을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으로 인정한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법인이 도급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피고인 법인의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게도 피고인 법인이 도급인임을 전제로 한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의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이 아니어도 업무상과실 책임은 별도로 문제 될 수 있다
다만 발주자가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형사책임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 책임과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 책임은 그 성립요건이 다릅니다.
발주회사 소속 임직원이 구체적인 업무분장이나 현장 관여를 통하여 특정한 사고 방지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위반하였다면, 별도의 업무상과실치사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실제로 대법원도 피고인 법인 소속 일부 직원들에 대해서는 회사가 건설공사발주자에 해당한다는 전제에서, 이들에게 어떠한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었는지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시 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산업재해 사건에서는 회사가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하는지와 개별 임직원에게 형법상 주의의무가 인정되는지를 구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형식보다 실제 공사 수행 구조를 살펴야 한다
대법원 2024도5902 판결은 건설공사 발주자의 형사책임을 판단할 때 형식적인 계약관계나 조직상의 직책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공사 현장에서 누가 유해·위험요소를 통제하였는지, 누가 시공방법과 작업절차를 결정하였는지, 발주자가 해당 공사에 관한 전문성과 시공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입니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급계약서와 안전관리 관련 특약, 공사 조직도와 업무분장표, 현장회의록, 작업지시서, 안전점검 기록, 공정관리 자료, 발주자와 수급인 사이의 전자우편 및 업무지시 내용 등입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발주자의 행위가 단순한 계약이행 확인에 불과하였는지, 아니면 실제 시공과 안전관리를 지휘·통제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이번 판결은 건설공사발주자의 정당한 관리·감독 활동까지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 공사를 지배·관리한 사업주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겠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