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물품 제작·설치계약에서는 통상 납품, 설치 또는 시운전 완료를 잔금 지급조건으로 정합니다. 계약 이행이 중간에 중단되면 발주자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금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발주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을 더 이상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제작·설치를 완료하지 못한 당사자도 약정된 대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민법 제538조 제1항이 정한 ‘채권자귀책사유로 인한 이행불능’의 법리입니다.
제가 원고를 대리한 사건에서도 해외 현장의 산업설비 설치와 시운전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법원은 발주 측의 책임 있는 사유로 이행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하여 미지급 잔금 1억 2,870만 원 전액을 인정하였습니다.
2. 사건의 개요
원고는 피고와 산업용 열처리 설비를 제작하여 해외 현장에 납품·설치하는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계약대금은 11억 7,000만 원에 부가가치세를 별도로 지급하는 조건이었으며, 대금 지급시기는 다음과 같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계약금 30%: 계약 후 15일 이내
중도금 50%: 지정 장소 납품 후 15일 이내
잔금 20%: 설치·시운전 완료 후 15일 이내
계약 체결 후 다른 회사가 계약 관련 채무를 인수하였고, 계약금과 중도금 및 잔금 일부가 지급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부가가치세를 포함한 잔금 1억 2,870만 원이 미지급 상태로 남았습니다.
해외 현장에서는 열처리로 본체, 냉각 탱크 및 승강장치, 자동 이적재장치의 설치가 모두 완료되었고, 전기시설도 90%까지 설치된 상태였습니다. 남은 2차 전기 배선공사는 약 2주면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지 재정 사정으로 외부에서 메인 컨트롤 패널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1차 전기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차 전기공사는 원고의 계약상 업무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고, 1차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설비의 테스트와 시운전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피고는 해외 현장에서 철수할 예정이라며 원고에게도 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원고는 작업을 계속할 수 없어 현장에서 철수하였고, 피고들은 설치와 시운전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금 지급을 거절하였습니다.
3. 민법 제538조 제1항의 법리
민법 제538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권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이는 쌍무계약에서 적용되는 위험부담 원칙의 예외입니다. 계약상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더라도 그 원인이 상대방의 책임 있는 사유에 있다면, 채무자는 상대방에게 반대급부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여기서 말하는 ‘채권자의 책임 있는 사유’를 채권자의 작위나 부작위가 급부의 실현을 방해하고, 채권자가 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의칙상 비난받을 수 있는 경우라고 설명합니다(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2다59610 판결, 대법원 2011. 1. 27. 선고 2010다25698 판결).
따라서 민법 제538조 제1항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구체적인 작위 또는 부작위가 존재할 것
그 행위가 계약상 급부의 실현을 방해하였을 것
상대방이 그 방해행위를 피할 수 있었을 것
상대방의 행위로 인해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졌을 것
이행하지 못한 당사자에게 계약을 계속 이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을 것
4. 법원이 발주 측의 책임을 인정한 이유
가. 원고가 담당한 공사는 대부분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법원은 열처리로 본체, 냉각 탱크 및 승강장치, 자동 이적재장치의 설치가 100% 완료되었고, 전기시설도 90%까지 설치된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남은 2차 전기 배선공사는 약 2주의 작업기간만 확보되면 마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원고가 계약을 포기하거나 이행 능력을 상실하여 작업을 중단한 것으로 볼 만한 사정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공정률과 잔여공정의 내용은 원고가 계약을 계속 이행할 의사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뒷받침하였습니다.
나. 시운전에 필요한 1차 전기는 원고의 업무 범위가 아니었습니다
설비의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려면 외부에서 메인 컨트롤 패널까지 1차 전기가 공급되어야 했습니다. 원고는 메인 컨트롤 패널에서 각 기계로 전기를 공급하는 2차 전기 배선공사를 담당하였고, 1차 전기공사는 원고의 계약상 의무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발주 측이 1차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면서 원고는 설비의 테스트와 시운전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법원은 이와 같은 업무분장을 공사 중단의 책임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다. 피고가 먼저 현장 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피고는 해외 현장에서 철수할 예정이라며 원고에게도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원고 직원들이 피고의 철수 이후에도 현장에 남아 공사를 계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법원은 원고가 공사를 대부분 진행한 상황에서 피고의 철수 지시가 없었다면 계약상 공사를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결국 원고의 설치공사는 피고의 철수 지시와 1차 전기 미공급으로 더 이상 이행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민법 제538조 제1항에서 정한 채권자의 책임 있는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되었습니다.
5. 경제위기와 불가항력 주장에 대한 판단
피고들은 해외 현장의 IMF 구제금융과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자신들에게 귀책사유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IMF 사태와 그에 따른 자재 수급의 차질을 천재지변 등에 준하는 불가항력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02. 9. 4. 선고 2001다1386 판결).
법원은 이 사건에서도 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피고들의 불가항력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경제상황의 악화나 사업상 어려움은 통상 기업이 부담하는 경영상 위험에 해당하며, 이러한 사정만으로 계약상 책임이 당연히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6. 계약을 인수한 회사와 기존 계약 당사자의 책임
피고 측은 다른 회사가 계약을 인수하였으므로 최초 계약 당사자는 물품대금 지급채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민법 제454조에 따르면 제3자가 채무자와 계약을 체결하여 기존 채무자를 면책시키는 채무인수가 채권자에게 효력을 가지려면 채권자의 승낙이 필요합니다.
대법원도 채무인수가 면책적인지 중첩적인지 불분명한 경우에는 중첩적 채무인수로 보아야 하고, 면책적 채무인수로 볼 특별한 사정에 대한 증명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측이 부담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02. 7. 12. 선고 2001다81948 판결, 대법원 2002. 9. 24. 선고 2002다36228 판결).
이 사건에서는 원고가 최초 계약 당사자를 채무에서 면제하는 데 승낙하였다고 볼 증거가 없었습니다. 이에 법원은 최초 계약 당사자와 계약 관련 채무를 인수한 회사가 연대하여 미지급 물품대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7. 판결 결과
법원은 피고들이 연대하여 원고에게 다음 금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미지급 물품대금: 128,700,000원
지연손해금: 2021. 10. 19.부터 완제일까지 연 12%
소송비용: 피고들 부담
가집행: 가능
설치와 시운전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원고가 청구한 미지급 잔금 전액이 인정된 것입니다.
8. 계약 중단 분쟁에서 확인해야 할 사항
민법 제538조 제1항의 적용 여부는 계약이 중단된 결과와 함께 그 과정에 관한 증거를 토대로 판단됩니다. 계약 중단이 예상된다면 다음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약서, 견적서 및 업무분장표
설비별 공정률과 작업일지
현장 사진 및 동영상
상대방의 작업중단 또는 철수 지시
선행공정과 협조의무의 담당 주체를 확인할 자료
계약을 계속 이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메일이나 공문
남은 공사의 내용과 예상 소요 기간
미이행으로 절감된 재료비·인건비 등의 자료
특히 “상대방 때문에 이행하지 못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대방의 구체적인 행위, 계약 이행에 미친 영향, 이행불능에 이른 과정을 객관적인 자료로 연결해야 합니다.
한편 민법 제538조 제2항은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면함으로써 얻은 이익을 상대방에게 상환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남은 공사를 수행하지 않아 재료비나 인건비가 절감되었다면 그 금액이 청구액에서 고려될 수 있으므로, 절감비용도 별도로 산정해야 합니다.
9. Q&A
Q1. 발주자가 공사를 중단시키면 계약대금 전액을 청구할 수 있나요?
발주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졌고, 공급자에게 계약을 계속 이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남은 공사를 하지 않아 절감한 비용이 있다면 민법 제538조 제2항에 따라 공제될 수 있습니다.
Q2. 계약서에 ‘시운전 완료 후 잔금 지급’이라고 정한 경우에도 잔금을 청구할 수 있나요?
시운전을 완료하지 못한 원인이 발주자의 선행조치 미이행이나 철수 지시에 있다면 민법 제538조 제1항에 따른 청구가 가능합니다. 지급조건의 문언과 함께 그 조건을 성취할 수 없게 된 원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Q3. 어느 정도의 공정률이 되어야 민법 제538조가 적용되나요?
법률상 정해진 공정률 기준은 없습니다. 공정률은 공급자의 이행 의사와 능력을 판단하는 요소이며, 핵심은 상대방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졌는지 여부입니다.
Q4. 발주자의 자금난이나 사업성 악화도 불가항력에 해당하나요?
일반적인 자금난이나 경제상황의 악화는 통상 경영상 위험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계약서에 정한 불가항력 조항과 실제 사업 중단의 원인에 따라 개별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Q5. 철수 지시를 구두로만 받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철수 지시를 받은 직후 이메일, 공문 또는 내용증명으로 지시 내용을 확인하고, 작업을 계속할 의사와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전달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화녹음, 현장 관계자의 진술, 출입국 기록과 철수 비용 자료도 증거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Q6. 계약을 인수한 회사에만 대금을 청구해야 하나요?
채무인수의 내용과 채권자의 승낙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채권자가 기존 채무자의 면책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기존 계약 당사자와 채무인수 회사가 함께 책임을 부담할 수 있습니다.
10. 맺음말
제작·설치계약이 중단된 사건에서는 계약서에 기재된 잔금 지급조건, 당사자별 업무 범위, 중단 당시의 공정률, 선행조치의 이행 여부와 철수 지시의 경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설비별 공정률과 전기공사의 책임 범위, 발주 측의 철수 지시를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하였습니다. 그 결과 법원은 발주 측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미지급 잔금 1억 2,870만 원 전액을 인정하였습니다.
계약 이행이 중단될 가능성이 생겼다면 현장 상황과 이행 의사를 즉시 문서로 남기고, 공정률과 잔여공정을 구체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초기 단계에서 확보한 자료가 향후 대금청구 소송의 결론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